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무 덴노 (문단 편집) ===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 === 당시 후지와라 집안 사람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맡았던 4형제가 잇달아 병사하자 국정을 카츠라기 왕(葛城王) 즉,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가 맡게 되었는데, 그는 [[코묘 황후]]와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였다. 또한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기비노 마키비와 승려 겐보(玄昉)가 중용되면서 후지와라 세력이 크게 후퇴했다. 앞서 천연두로 죽은 후지와라 4형제 중 우마카이(宇合, 식가)의 맏아들 히로츠구(広嗣)는 덴표 10년(738), 야마토노카미(大養德守)에서 진제이(鎭西, 진서)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로 직위가 바뀌었다. 그는 이를 좌천이라 생각하고 크게 불만을 품어 덴표 12년(740) 8월 29일에 시정을 비판하고 기비노 마키비와 겐보를 처분하라고 요구하는 표문을 조정에 보냈다. 9월 3일, 히로츠구가 거병했다는 소식이 빠른 말을 통해 수도 헤이조쿄에 도착했고, 천황은 오오노노 아즈마히토(大野東人)를 대장군으로 삼아 절도를 하사한 후, 부장군으로 기노 반마로(紀飯麻呂)를 임명했다. 그리고 도카이(東海), 도산(東山), 산인(山陰), 산요(山陽), 난카이(南海) 등 5도(道)의 군사 1만 7천 명을 동원하도록 명령했다. 4일, 조정에 출사한 [[하야토]] 24명에게도 종군하라고 명령했고, 다음날 사에키노 쓰네히토, 아베노 무시마로가 칙사로 임명되어 전승 기원을 위해 이세 신궁에 폐백을 봉납하는 한편, 여러 쿠니에 관음보살상을 만들고, 《관음경》 10경을 사경하여 전승을 기원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9월 21일, 나가토국에 도착한 오오노노 아즈마히토는 현지에 정박해 있었던 신라선의 인원과 기기를 채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음날인 22일에 칙사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노 무시마로가 하야토 24명, 군사 4천 명을 이끌고 항해하여 판궤진(板櫃鎭, 부젠국 기쿠군)을 공략하고, 등미(登美)·판궤(板櫃)·경도(京都) 3진의 군사 1767명과 병기 다수를 노획했다.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는 기쿠군 근처의 원가군에 도착하여 봉화불로 쿠니 안의 군사들을 모았는데, 히로츠구 자신은 오스미· 사쓰마 · 지쿠젠 · 분고 4국의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구라테도로 나아갔으며, 동생 후지와라노 츠나테(綱手)로 하여금 지쿠고 · 히젠 2국의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분고에서 진군하도록 했다. 그리고 다고고마로를 전하도로 진군하게 해서 관군을 세 방면에서 포위하려고 했다. 9월 25일, 부젠의 여러 군지(郡司, 군사)들이 각기 500기, 80명, 70명 등을 이끌고 관군에 투항해 왔다. 9월 29일, >"히로츠구는 흉악한 역적으로 광포하게도 반란을 일으켜 인민을 괴롭히니 불효불충의 죄를 신이 벌하실 것이다. 따르는 자들은 즉시 귀순하라. 히로츠구를 죽이는 자에게는 5위 이상을 내리겠다" 는 내용의 칙이 규슈 여러 쿠니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발호되었다. 10월 9일에 히로츠구의 군사 1만 기는 판궤하(기타큐슈市)에 이르러 강 서쪽에 포진했고, 칙사로 보내진 사에키노 쓰네히토 · 아베노 무시마로의 6천여 군사들은 강 동쪽에 포진했다. 하야토를 선봉에 세우고 조를 짜서 강을 건너려는 히로츠구군에 관군은 쇠뇌를 쏘며 막았다. 한편으로 휘하의 하야토들을 시켜 적측의 하야토에게 투항을 권하도록 했다. 이에 히로츠구측의 하야토들이 화살 쏘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쓰네히토 등은 10번이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를 불렀다. 말에 탄 히로츠구가 나타나 칙사를 찾으며,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면서 >"나는 조정에 항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정을 어지럽히는 두 사람(기비노 마키비와 겐보)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조정에 항명하는 것이라면 모든 신들이 벌하실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쓰네히토 등이 >"그렇다면 뭐하러 병사까지 이끌고 왔는가?" 라고 묻자, 히로츠구는 대답하지 않고 말에 오른 다음 돌아가버렸다. 당시 문답을 듣고 있던 히로츠구측의 하야토 세 명이 강에 뛰어들어 관군쪽에 가담해버렸고, 이어 히로츠구군의 하야토 20명과 10여 기가 잇따라 관군에 항복해 버렸다. 투항자들은 세 방면에서 관군을 포위한다는 히로츠구의 작전을 관군에게 보고했고, 아직 다른 두 방면의 군사들은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렸다. 결국 판궤하에서 패전한 히로츠구는 배를 타고 히젠(肥前)국 마쓰우라군 지가 섬(오도 열도)으로 건너가 그대로 신라(新羅)로 망명하려 했지만, 탐라(耽羅) 근처까지 이른 배는 더 나아가지 않고 역풍까지 불었다. 히로츠구는 >"나는 대충신이다. 신령이 나를 버리실 리는 없다. 신이시여, 풍파를 가라앉혀 주소서." 라 빌며 역령을 바다에 던졌지만 풍파는 더욱 격렬해졌고 끝내 배는 지가 섬으로 돌아왔다. 섬에 숨어 있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는 10월 23일, 마침내 아베노 구로마로에게 붙잡혔고, 11월 1일에 오오노노 아즈마히토에 의해 형제인 츠나테와 함께 히젠국의 가라쓰(唐津)에서 처형되었다. 덴표 13년(741) 1월에 사죄 16명, 몰관 5명, 유배 47명, 강제이주된 자 32명, 장을 맞은 자가 177명으로 히로츠구의 난은 마무리되었고, 히로츠구의 아우들도 대부분이 연좌되어 유배에 처해지면서, 히로츠구의 후손인 후지와라 '시키케'(式家, 식가)는 '난케'(남가)와 '홋케'(북가)에 눌려 한동안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반란의 진압을 알리는 보고가 미처 헤이조쿄에 닿기도 전에, 쇼무 덴노는 갑자기 간토로 내려간다면서 수도를 떠나버렸다. 이후 천황은 이가국, 이세국, 미노국, 오미국을 돌아다닌 끝에 구니노미야코(恭仁京, 야마시로국)로 수도를 옮겼다. 그후로도 거듭 나니와노미야코(難波京)로 옮겼다가 다시 헤이조쿄로 돌아오는 식으로 거듭 천도를 반복했다. 머나먼 진제이에서 일어난 '''후지와라노 히로츠구의 난'''을 쇼무 덴노가 얼마나 무서워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